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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 한편의 서사시 '리니지2' 바츠 해방사건

심정선 기자

2015-11-20 18:39

수 많은 게임들이 플레이되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이 벌어집니다. 게임 내 시스템, 오류 혹은 이용자들이 원인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은 게임 내외를 막론한 지대한 관심을 끌기도 합니다.

데일리게임은 당시엔 유명했으나 시간에 묻혀 점차 사라져가는 에피소드들을 되돌아보는 '게임, 이런 것도 있다 뭐', 줄여서 '게.이.머'라는 코너를 마련해 지난 이야기들을 돌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게.이.머'의 다섯 번째 시간에 다룰 사건은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인 '바츠 해방전쟁'입니다. 엔씨소프트의 '리니지2'의 서버 중 하나인 바츠에서 2004년경 벌어진 이 사건은 이후로도 오래 화자 되었는데요.

지위를 내세워 바츠 서버를 장악한 '드래곤나이츠 혈맹'(Dragon Knights, 이하 DK)의 폭거에 모든 서버의 이용자가 연합군을 구축해 맞서는 구도로 전개된 '바츠 해방사건'은 당시 언론을 통해 소개되기도 하고 이후 TVN 채널의 예능 프로그램인 SNL에서 '으리니지2'라는 코너로 패러디되기도 하며 일반 대중에게도 알려졌습니다. 이 전쟁에 참여한 이용자 인원만해도 20만 명에 달할 정도라고 하니 그 거대한 규모가 짐작이 갑니다.

[게.이.머] 한편의 서사시 '리니지2' 바츠 해방사건

◆바츠 서버를 지배한 DK 혈맹은?
DK 혈맹은 전작인 '리니지'에서도 '강력한 혈맹'의 대명사로 통하던 혈맹이었습니다. '리니지' 데포루쥬 서버의 모든 성을 공성전에서 점령하고 몇 년간 장기집권에 성공하기도 할 정도였으니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었죠. '리니지' 최초로 사냥터 통제를 시작했다는 말도 나올 정도였습니다.

'리니지2'가 정식 서비스되자마자 '리니지1'에서 '리니지2'로 자리를 옮긴 DK 혈맹은 뛰어난 단결력으로 제1 서버인 바츠 서버를 장악해버렸습니다. 바츠 서버의 모든 영지를 장악하고 사냥터에 대한 통제를 시작하며 좋은 사냥터의 이익을 독점한 것이죠.

DK 혈맹 집회
DK 혈맹 집회

이런 행동들로 DK 혈맹은 타 이용자와 혈맹과 무수한 마찰을 빚었는데요. 그러나 수많은 전쟁에도 누구도 DK 혈맹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기란성 앞 다리 척살 사건입니다. 기란성에 출입하려는 모든 길드 외 이용자 캐릭터를 PK한 것인데요. 과도한 PK 때문에 호출된 GM들이 성을 개방하라는 명령도 군주님이 지키라고 했다는 말로 거부하고 단체로 블록을 당한 사건입니다.

DK 혈맹은 높은 세금과 사냥터 통제 및 독점으로 얻은 아덴(게임 내 재화)을 통해 갖춘 높은 레벨과 좋은 장비에 더불어 지도부의 정치력과 혈맹원간 단합력에 기반해 장기집권을 하고 있었습니다.

◆ 바츠 해방 전쟁의 발발 '붉은혁명' 혈맹
2004년 DK 혈맹은 모든 영지의 세율을 10%에서 15%로 인상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리니지2'에서는 상점에서 판매되는 아이템 수익은 영지를 소유한 혈맹의 수익으로 들어오게 되는데요. 이는 바츠 서버에서 게임을 즐기던 게이머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됐고 이제껏 DK 혈맹과 마찰이 없었던 이용자들도 반발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2004년 5월 9일. DK 혈맹에 반기를 들어 오던 '붉은혁명' 혈맹은 DK 혈맹이 차지하고 있던 기란성을 점령하고 기란성의 세율을 0%로 내렸습니다. DK 혈맹의 보복 공성으로 붉은혁명 혈맹은 이내 기란성의 소유권을 잃게 되지만 이는 바츠 서버에서 불만을 품고 게임을 즐기던 수많은 일반 이용자들의 참여를 북돋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동안 중립을 고수하던 여러 중소 혈맹들이 나서기 시작해 급기야는 바츠 연합군이 결성됐습니다. 다만 거대혈맹 연합의 사냥터 제한에 의해 정상적인 레벨업을 할 수 없었기에 상당수가 저레벨이었던 바츠 연합군은 거의 일방적으로 DK 혈맹에 도륙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호소문
당시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호소문

그러나 이런 일방적인 학살이 오히려 '리니지' 이용자들의 정의감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더불어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호소문이 올라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켜 더 많은 참여가 이뤄졌습니다.

이윽고 전 서버의 '리니지2'의 이용자들이 자신들의 서버에서 육성하던 캐릭터를 내려놓고 바츠 서버로 몰려와 DK 혈맹을 타도하겠다는 명분으로 초보자 캐릭을 만들어 거대 혈맹 연합에 맞서는 소설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 바츠 해방 전쟁의 주역 '내복단'
2004년 당시 '리니지2'는 캐릭터 서버 이전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타 서버 이용자들은 바츠 서버에서 신규 캐릭터를 생성해 DK 혈맹과 연합 관계에 있는 3대 혈맹과 맞서야 했습니다. 이때 그들이 착용한 기본 초보자 장비가 내복을 입은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들을 '내복단'이라고 불렀는데요.

내복단은 착용한 아이템이 스펙이 대체로 매우 낮은 편이기 때문에 인해전술로 DK 혈맹을 압박했습니다다. 일례로 당시 고레벨 사냥터인 '용의 계곡'과 그 던전에서 수십 명씩 진을 치고 기다리다, DK 혈맹과 그 동맹이 출현하면 떼를 지어 공격하는 방식으로 상대해나갔죠.

내복단의 이름을 건 이벤트가 나올 정도
내복단의 이름을 건 이벤트가 나올 정도

점점 악화하는 여론과 내복단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DK 혈맹은 강력한 스펙으로 전장을 압도하며 전쟁을 지속했습니다. 하지만 명분을 등에 업은 연합군의 세력은 전 서버에서 몰려든 지원군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었죠.

그러다 2004년 6월, 3대 혈맹의 하나인 제네시스 혈맹이 DK 혈맹과 동맹을 파기하고 연합군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전황이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7월에는 32개 혈맹으로 불어난 연합군이 5개의 요충지 중 하나인 오렌성을 차지하게 됐고 2004년 7월 17일에는 DK 혈맹이 장악하고 있던 '리니지2' 최대의 성인 아덴성을 노리게 됩니다.

공성전이 시작되기 24시간 전 양쪽은 '공성 등록'과 '수성 등록'을 해야하는 '리니지2'의 시스템을 이용해 등록 마감 직전에 제네시스 혈맹과 연합군은 아덴성으로 달려가 마감 3분 전 공성 등록을 신청하는 심리전을 펼쳐 공성 등록 혈맹 26개, 수성 등록 혈맹은 단 1개라는 유리한 조건으로 공성을 시작했습니다.

공성전 당일 연합군은 수적으로 크게 우위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DK 연합군의 노련한 전술에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DK 연맹은 최소의 궁수 파티만 남겨둔 채 주력 병력을 차출해 오렌성으로 진군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오렌성
오렌성

이 사실을 안 연합군은 오렌성 수성을 포기하고 아덴성 공격을 지시했고 결국 오렌성을 정복하기 직전인 DK 혈맹은 아덴성이 공격받는 것을 알고 회군하게 되죠.

아덴성으로 돌아가려 오렌성을 나온 그들이 조우한 것은 바로 수백명의 내복단이었습니다. 그들의 폭정에 분노하고 호소문에 동조해 여러 서버에서 건너온 그들은 마을 입구를 막고 시체로 바리케이드를 쳐가며 DK 혈맹원들의 아덴성 진군을 필사적으로 저지했습니다.

DK 연합군은 급한 마음에 PK 패널티도 불사하고 내복단을 PK하면서 까지 마을을 벗어나려 하였으나 내복단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버텼고 DK 연합군이 내복단의 인간 바리케이드에 고전하는 사이 아덴성은 바츠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리니지2' 최대의 거점 아덴성을 탈환한 이날 바츠 연합군은 물론 전 서버의 '리니지2' 이용자가 환호했습니다. '바츠 해방의 날'로 불리는 이 날 공식 홈페이지는 이를 기념하는 수천 개의 글로 도배됐으며, 언론에서도 바츠해방전쟁을 기사화하기도 했습니다.

아덴성
아덴성

누가 뭐래도 해방의 주역은 폭정에 분노해 다른 서버까지 건너와 힘을 보탠 내복단이었던 것이죠.

아덴성 공성전에서 패배한 DK 혈맹은 2004년 11월까지 기란성, 글루디오성 마저 모두 연합군에 빼앗기고 고레벨 사냥터인 '오만의 탑'에 진출해 몇 년을 지내게 됩니다.

◆바츠 해방전쟁 그 이후
바츠 해방 전쟁을 모티브로 2011년 그려진 공식 아트컷
바츠 해방 전쟁을 모티브로 2011년 그려진 공식 아트컷

바츠 해방전쟁은 국내 MMORPG 역사상 가장 큰 서버 규모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이용자들 사이에서나 언론에서나 큰 관심을 보인 사례입니다. 특히 바츠 해방전쟁이 보여준 양상은 현실세계의 정치와 비슷해서 이것에 주목한 학자도 많았지요.

하지만 이 바츠 해방전쟁이 지나치게 한쪽의 의견만이 부여됐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DK의 입장이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친 의미부여를 했다"는 것이죠. 내복단에 대해서도 먹자를 하러 간 사람들도 많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또한 전리품을 둘러썬 갈등으로 분열한 연합군을 DK 혈맹이 다시 역습해 다시 패권을 잡게 됐고,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1, 2차 바츠 해방전쟁 때부터 반 DK 혈맹의 중심에 서있던 붉은혁명 혈맹이 패권을 잡아 사냥터 통제를 선언하는 등 씁쓸한 결말이 나기도 했습니다.

출처 은행나무출판사
출처 은행나무출판사

한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니만큼 문학계에서도 모티브를 따오거나 이를 다룬 글들도 많았는데요. 대표적인 글은 이인화의 '바츠 해방전쟁-돌아오지 않는 전사들', 소설가 명운화가 쓴 '바츠 히스토리아'는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제 7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강희진의 '유령'도 바츠 해방전쟁을 주요 소재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 사건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심정선 기자 (narim@dailyga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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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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