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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석] 블리자드와 전디협, 상상과 구현의 차이

심정선 기자

2017-03-03 12:40

창작자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일까. 작품으로 성공해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최고겠지만 그 외 정신적인 플러스 요인을 찾는다면 말이다. 아마도 내 창작물로 인해 사람이, 세상이 변했다는 느낌을 받는게 아닐까.

내 작품에서 시작된 움직임이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또 그런 일을 겪는다는 것은, 온갖 위법적이며 비도덕적인 상상 대부분이 허용되는 오밤 중 이불 속에서도 차마 하기 힘들 정도로 부끄러운 일 중 하나다.

상상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인만큼 실제로 이를 겪은 창작자는 당장 자랑하고 싶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해외 유명 개발자라도 동일한 것 같다.

블리자드의 '오버워치' 게임 디렉터 제프 카플란은 지난 22일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다이스 서밋 2017 기조 연설에서 스케일 큰 자랑을 했다.

그는 한국의 한 페미니즘 단체 '전국디바협회'(이하 전디협)를 직접 언급하며 "지난 1월 '서울 세계여성공동행진'에서 전디협을 발견했다"며 해당 협회의 헌장 '전국디바협회는 디바를 우리의 마스코트로 삼아, 그와 같은 사람이 실제로 나타날 수 있는 성평등한 2060년을 만들기 위해 페미니즘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를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며 '오버워치' 속 단편 애니메이션 '소집'의 대사를 인용해 "그리고 바로 이 것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이끈 적도 없고 '오버워치'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게임은 아니지만, '오버워치' 개발팀이 키운 가치가 이용자들에게 나름의 긍정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놀랍고 멋지다"고 말했다.

전디협은 디바가 단지 한국인 여성 캐릭터이며 프로게이머이기 때문에 마스코트로 삼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선택의 뒷면에는 2016년 국내 게임 풍토에서는 한국 출신의 여성 천재 프로게이머라는 존재는 태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비판적인 해석이 자리하고 있다.

일례로 '오버워치' 대회에서 특출난 실력을 보인 '게구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른 팀 선수들로부터 핵 사용 의심까지 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성희롱과 살해 협박까지 당한 '게구리'는 결국 얼굴을 가린 채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보여야만 했다. 방송 이후로 실력을 의심하는 일은 사라졌지만 쓸데 없는 외모 품평은 아직도 따라 붙고 있다.

블리자드 디렉터 지프 카플란의 감동과는 별개로 전디협은 현재까지도 각종 협박과 조롱에 시달리고 있다. 블리자드에 전디협이 사실은 과격 단체인 '페미나치'인 것을 알리겠다는 협박(?)이나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를 당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제프 카플란이 '나치'라는 단어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유대인인 것과 실제로 전디협이 판매한 상품이 없다는 사실은 제쳐두고 말이다.

사실 성역할 다양화를 지향하고 있는 '오버워치'에서 미성년자가 신체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전신 타이즈를 입고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군인' 신분의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이를 페미니즘 단체가 마스코트로 삼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제프 카플란이 언급한 내용을 전디협 관계자에게 전하자 그는 말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하며 크게 감격했다.

그는 "'미래의 여성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더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과, 좋아하는 게임과 캐릭터가 합쳐져 나온 것이 전국디바협회"라며 "원작자가 이러한 전디협의 페미니즘적 취지와 의의를 정확히 알고 공감해줬다는 것이 정말로 기뻤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블리자드가 본인들을 '인정'해줬다는 데 기뻐한 것이 아니다. 옳음은 자신의 행동 속에 내재돼 있고 단지 그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블리자드의 인정이 없었어도, 심지어 부정당했어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블리자드는 자신의 작품이 세계에 펼칠 영향을 상상했고 전디협은 자신의 상상을 구현해가고 있다. 누가 더 낫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우리 눈앞에 있는 증거들을 애써 부정하지는 말자는 말이다.


심정선 기자 (narim@dailygame.co.kr)

심정선 기자

narim@dailyga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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